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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용, 정체가밝혀지다.

by 뺀질한라이프 2021. 9.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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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용

네이버, 다음 ,줌 등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서 '김원용'이라는

키워드가 급상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키워드로 막상 들어거고자

아무것도 뜨지 않으며 관련 된 인물들이 뜹니다.

포털 사이트에는 '김원용 CIA'라는 단어가 관련 검색어에 

보이는데요.

일단 포털 사이트에 등록되어있는 인물의 정리부터 해드리겠습니다.

김원용

김원용

1896년 생으로 일제 강점기를 거쳐

1976년 까지 80세의 나이까지 사셨다.

 

시대적 상황에 따라 직업으로는 독립운동가, 언론인, 정치인,

저술가 등을 하셨다.

김원용

시대별 주요 활동 사항

1917년 5월

중국 망명 중 유학을 목적으로 미국으로 넘어가

탄광에서 일을 하기 시작하였다.

 

1918년 4월

김호라는 인물과 함께

대한인국민회를 설립하고 재무담당을 맡았다.

김원용

1920년

학생총회결성발기자회에 참가하여

각지의 한인 학생과 한인회를 통합하였다.

더불어 중서부와 동부지방에서 독립운동을

후원하기 위해 지방조직을 결성하였다.

 

1930년 

하와이로 이주하여 대한인교민단에 입단하였다.

 

1931년

하와이 대한인교민단의 기관기인 '국민보'의 편집인이 

되었고,교회재산과 교민단 회관을 매각하여 동지회의

재정을 충당하련느 이승만에 반대하는 투쟁을 벌였다.

김원용

1932년

김구의 한인애국단을 비밀리에 후원하는

하와이애국단에 가입하였다.

 

1933년 

하와이 대한인국민회를 복설시키고 총무가되어

한인단체의 통합과 한인사회의 부흥에 앞장섰다.

 

1936년 

하와이 대한인국민회의 기관지인

'국민보'의 주필이 되었다.

김원용

1941년

해외한족대회에 참석하여

대한민국 독립과 관련된 선언문과

해외 한족대회 결의안을 작성하였고,

이어 결성된 재미한족연합위원회의

의사부의 비서 겸 행정위원으로 지명되었다.

 

1944년

13개 한인단체에서

외교위원장으로 선출되었고,

김원용

1945년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의사부 

위원장을 맡았다.

 

해방 후

조국의 재건을 후원하기 위해 한국으로 귀국,

남조선과도입법위원의 의원으로 선출되어

1년 간 조국을 위해 활동하였다.

그 후 미국으로 다시 돌아가

한인사회 발전에 끊임없이 기여하였다.

 

 

김원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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